함열남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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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사(氏族史) 개요
씨족사(氏族史) 개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는 고려~조선조에서 착실하게 가문의 기반을 다졌다. 시조 남궁원청(南宮元淸)은 고려조에서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며 남궁신(信)은 충혜왕(忠惠王)때 호군(護軍)으로 충혜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조적(曺)의 난"으로 충혜왕이 원(元)나라에 잡혀갔을 때 함께 잡혀가 왕을 보좌한 공으로 1342년(충예왕 복위 3)에 일등벽상공신(一等壁上功臣)이 되었으며 관직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또한 1336년(충숙왕 복위 5)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여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으로 왕(王)에게 학문을 가르친 남궁민(敏) 등은 고려조에서 남궁가를 빛낸 명현들이다.

이밖에 남궁용재(用材) 장군(將軍)을 비롯하여 호부낭중(戶部郞中) 주(柱), 시위장군(侍衛將軍) 석(奭), 낭장(郞將)백(伯), 판도판서(版圖判書) 경(暻),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진(瑨), 경산부사(京山府使) 찬(贊),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양(亮), 민부상서(民部尙書) 기(起), 총랑(摠郞) 현령(縣令), 소부시윤(小府寺尹), 헌납(獻納) 판사(判事),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 여러 분야에서 관직을 역임한 이들의 이름이 사서에 전한다.

조선 초기의 인물로는 문음(門蔭)으로 등용되어 사과(司果)를 역임하고 개국 초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을 도운 공으로 1401년(태종 1)에 좌명원종공신(佐命原從功臣)이 된 남궁계(啓)가 있다. 공(公)은 곧 대호군(大護軍)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친 뒤 1435년(세종 17)에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明)나라를 다녀와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하였다. 1439년(세종 21)에는 전라병마도절제사(全羅兵馬都節制使)가 되었으며 1443년(세종 25)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 1446년(세종 28) 공이 별세하시니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매우 슬퍼하시고 승지(承旨)로 하여금 대신 문상(問喪)하게 하였으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상수(喪需)를 내리시고 호상(護喪)하도록 하명하시었다. 공이 생전에 나라에 이바지한 공으로 조정으로부터 서울의 도봉동(道峰洞) 일대를 식읍(食邑)으로 하사 받았는데 5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후손 150여 가구가 이 동네에 밀집해 살고 있다.

도봉산 또한 남궁씨(南宮氏)의 종산(宗山)이었는데 일제시대에 강제로 국가에 귀속되고 지금은 선영(先塋)이 있는 13만여 평만이 남궁씨의 종중재산(宗中財産)으로 남아있다. 남궁씨는 조선조(朝鮮朝)에서 총 15명의 문과(文科) 급제자를 냈다. 그중 남궁찬(璨)은 조선조에서 함열남궁씨를 대표하는 명현이다.

공(公)은 1489년(성종20)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왕(王)의 시강관(侍講官)으로 문명(文名)을 날려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올랐으며 연산조(燕山朝)에서는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조참판(吏曹判), 강원도 관찰사, 제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럼에도 공(公)은 연산의 폭정에 반발하며 극간(極諫)을 서슴지 않았고 특히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연산군 4)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한 김종직(金宗直)과 당시에 처형된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그리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효수(梟首)된 김굉필(金宏弼) 등 신진사류(新進士類)를 신구(伸救)하는 등 정의(正義)를 위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公의 이같은 기질(氣質) 때문에 결국은 연산의 미움을 사게 되었으며 갑자사화(甲子士禍) 때인 1504년(연산군10甲子) 6월 13일 장형(杖刑)과 더불어 전라도 용안(龍安)으로 유배(流配)되고 얼마후 배소(配所)에서 향년(享年) 52세로 별세했다.

公은 중종반정(中宗反正)후 복관(復官)되어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公에 대한 재미있는 전설(傳說)이 있다. 당시 公의 문명(文名)이 명(明)나라에까지 알려져 公이 별세한 뒤 명(明)의 조정에서 인문석(人文石: 문관형태의 석물)을 하사했는데 배로 옮기던 도중 태풍을 만나 바다속 깊이 잠겨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신통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이 인문석이 서해안 바닷가에 밀려와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전북 익산시(益山市) 성당면(聖堂面) 갈산리(葛山里) 목사동(木寺洞)에 자리잡은 公의 묘소 앞에 서 있는 인문석이 바로 당시의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인문석으로는 유일하게 중국 문관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그 크기가 또한 예사롭지 않아 전라북도는 이 인문석을 지방유형문화재(地方有形文化財) 제176호로 지정하고 도(道)에서 보호하고 있다.

남궁찬은 필(弼: 현감), 익(翼: 현령), 숙(淑: 관찰사, 판윤), 열(說: 습독관)의 네 아들을 두어 가문을 번창케 하였는데 이들중 삼남(三男) 숙(淑)은 1533년(중종 28)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황해, 전라, 함경도 관찰사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하였다. 또한 남궁찬의 손자대(孫子代)에서 오늘의 7파조(七派祖)가 형성되는데 이들 동항(同行)에서 무려 3명의 문과 급제자가 나오고 이후에도 관면(官冕)이 이어져 가문(家門)의 전통을 빛내고 있다.

남궁필(弼)의 장남 효(孝)가 1534년(중종 29)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여 교리(校理)까지 올랐으나 다음 대(代)에서 절손(絶孫)되어 계대(繼代)하지 못했다. 다만 차남 후(厚)가 계대하여 함열남궁씨의 종가(宗家)가 되고 벼슬이 진사참봉(進士奉)을 역임한 관계로 참봉공파( 奉公派)라 이르게 되었다.

남궁익(翼)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희(憘)는 1549년(명종 4) 문과(文科)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여 관직이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사섬시정(司贍寺正)에 오르고 오늘의 교리공파(校理公派)를 이루었다. 차남 침( )은 형 보다 9년 앞선 1540년(중종 35) 문과(文科) 별시(別試)에 급제한 뒤 관찰사, 한성부윤, 형조참판,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등을 역임했는데 그가 오늘의 대사성공파 파조(派祖)이다. 삼남 기( )는 지평현감(砥平縣監)을 역임했으니 의당 지평공파(砥平公派)의 파조(派祖)가 된다.

남궁숙(淑)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제(悌)가 연안부사(延安府使)를 역임한 관계로 연안공파의 파조(派祖)로 분류되며 차남 회(恢)는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올라서 승지공파의 파조(派祖)가 되는 것이다.

함열남궁씨 7파의 마지막 파조는 남궁숭(崇)으로 그는 남궁열(說)의 네 아들 중 유일하게 후사(後嗣)를 이어 계대(繼代)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관직을 역임한 적이 없어 그의 아호(雅號)인 모현(慕賢)을 따서 모현공파(慕賢公派)라 하고 파조(派祖)로 삼았다.

남궁희(憘)와 남궁침( )은 형제간으로 희(憘)는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으며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명망이 높았다. 동생 침( )또한 암행어사를 거쳐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지낼 때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또한 1565년 전라도관찰사 재직시 문화류씨 가정보 발간에도 기여하였다.

이들과 사촌간으로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을 지낸 남궁제(悌)는 수령을 지내는 동안 치적을 쌓아 왕(王)으로부터 "거관근간부역평균(居官勤幹賦役平均: 백성들에게 부역을 공평하게 시킴)"이란 8자(字)를 포상받았다. 분수를 지키며 욕심없이 사는 전통을 지켜왔고 그래서 청족(淸族)의 이름을 얻기도 했다. 연산조에서는 벼슬을 지내면서도 왕의 폭정에 항거하고 의(義)를 따라 차라리 장형(杖刑)과 귀양살이를 택했던 남궁찬(璨)의 기백이 곧 문중의 기질이다.

교리공파조(校理公派祖) 남궁희(憘)의 손자 격(格)과 증손자 흔(炘)은 청족(淸族)으로서의 가문의 기질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남궁격(格)은 광해군(光海君)이 모후(母后)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幽閉)시키는 패륜(悖倫)을 저지르자 벼슬 무주현감(茂朱縣監)을 버리고 홍천(洪川)으로 낙향했다.

또한 남궁흔(炘)은 은덕불사(隱德不仕)한 선비로서 가대(家垈)가 모두 삼전도(三田渡: 현 서울 송파동)에 있었는데 1637년(인조 15) 인조임금이 삼전도에서 청태종(淸太宗)에게 항복하고 2년 뒤 그곳에 한비(汗碑: 되놈의 비석)를 세움에 그 땅이 더럽다 하여 105결(結: 약 30만평)에 달하는 토지의 재산권(문서 등)을 불사르고 첩첩 산중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그래서 세인들은 노중연(魯仲連: 노나라 학자. 선비)과 같다고 하였다.

조선 중기의 남궁두(斗)는 단학파(丹學派)로서 신선술(神仙術)을 익힌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전라도 임피(臨陂)에서 태어나 1555년(명종 10)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하고 평범한 선비로 지냈다. 후에 경상도 의령(宜寧)의 한 암자(庵子)에서 지낼 때 도교(道敎)의 방술에 뛰어난 노승(老僧)을 무주(茂朱) 부근에서 만나 신선술 수련에 입문하였다. 정신통일을 위하여 <잠 안자는 법>, <곡기를 끊는 법>을 익히고 이를 운용하여 내단수련(內丹修鍊)의 극치인 신태(神胎) 일보 직전까지 도달하였다고 한다. 이수광(李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따르면 그의 나이가 90살이 되었어도 거의 늙지를 않았고 언제나 명산 대천을 떠돌아다녀 사람들은 그를 지선(地仙)이라 하였다고 한다. 조선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文臣)이자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저자 허균(許筠)이 "남궁두(斗)"를 대상으로 하여 사건전개의 동기를 잡고 쓴 한문소설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이 있다. <홍길동전>과 더불어 허균 소설의 쌍벽을 이룬다.

교리공파(校理公派)의 파조인 남궁희(憘)는 슬하에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가 곧 남궁활(活)이다. 활(活)은 1572년(선조 5) 문과(文科)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교서관교리겸춘추관편수관(校書館校理兼春秋館編修管)으로 있을 때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공조정랑(工曹正郞)을 거쳐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역임하였다. 슬하에 6형제를 두어 교리공파의 가문을 번창시켰다. 6남 철(澈)의 가계(家系)가 중간에 끊긴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함열남궁씨는 조선조 전 기간 중 1498년에 남궁찬(璨)이 문과에 처음 급제한 이래 16세기(1500년대)에 6명, 17세기에 6명, 18세기와 19세기에 각각 1명씩의 문과급제자를 냈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함열남궁씨는 16, 17세기가 가장 번창했다고 여겨지는데 1691년(辛味年)에 함열남궁씨 족보(族譜)가 처음으로 간행된 것도 가세(家勢)와 무관하지 않다.

1600년대에 우선 꼽을 수 있는 인물로 남궁경( )을 들 수 있다. 그는 1612년(광해군 4) 곡성현감(谷城縣監) 벼슬에 있으면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1616년(광해군 8) 행세자시강원필선(行世子侍講院弼善)으로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친 후 1625년(인조 3)에는 정3품 당상관(堂上官)으로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취임하였으며 곧 사은사(謝恩使) 박정현(朴鼎鉉), 부사(副使) 정운호와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귀국길에 공자(孔子)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와서 익산(益山)의 함열문묘(咸悅文廟)에 봉안(奉安)하였다. 1663년(인조 11) 향년 72세로 세상을 떴는데 문중에서는 그를 사인공(舍人公)이라 부른다. 그가 의정부사인(議政府使人)을 역임한 까닭이다.

1600년대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남궁율( )과 그의 아들 3형제 석(錫), 집(鏶), 옥(鈺)을 들 수 있다. 우선 남궁율( )은 1615년(광해군 7)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는데 음사(蔭仕)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당시 광해군(光海君)은 왕통(王統)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하여 선조(宣祖)의 첫째 왕자인 임해군(臨海君)을 제거하고 이어서 영창대군을 폐서인 시킨 뒤 대군의 외조부 김제남을 사사시키고 인목왕후(仁穆王后)를 폐비시킨 다음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등 조정이 매우 불안하고 혼미를 거듭하였다. 따라서 남궁율( )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과 자녀교육에만 힘썼다.

그 결과 장남 석(錫)은 1633년(인조 11)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兩試)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그의 문장과 필법(筆法)이 대단하여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차남 집(鏶)은 1618년(광해군 10) 18세의 소년으로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소년진사(少年進士)가 됐다. 12년 뒤인 1630년(인조 8)에는 문과(文科) 식년시(式年試)에 부장원(副壯元)으로 급제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됐다. 그 후 곡산군수(谷山郡守)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등을 역임하였다. 삼남옥(鈺)은 1652년(효종 3) 문과(文科) 증광시(增廣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관직이 군자감정(軍資監正) 즉 시정(寺正)에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글씨, 그림에 뛰어났으며 일곱곳의 군, 현을 다스리는 동안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을 떨쳤다. 1669년(현종 10)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있을 때 어명(御命)으로 고려 충신인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을 모시는 서원의 현판(懸板)과 대학자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을 모시는 서원의 현판(懸板)을 써서 하사(下賜)하게 하였다.

남궁제(悌)의 증손(曾孫) 남궁제( )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끝내는 거유(巨儒)로서 당대의 대유학자(大儒學者)가 되었다. 효행(孝行)도 지극하여 9세 때 벌써 어머님의 병환을 맞아서는 병세를 살피기 위하여 대변을 맛보았으며(상분험후: 嘗糞驗候) 17세 때(1642년 인조 20)부친의 병환을 당하여는 서지주혈( 指注血: 손가락을 씹어서 피를 복음케 함) 등 극진히 간병하고 돌아가신 뒤에는 여묘(廬墓: 묘막에서 지냄) 3년을 치루었다. 그런 효행은 1678년 (숙종 6) 계모(繼母)의 병환과 상사(喪事) 때에도 여전하였다. 11세 때에는 병자호란(丙子胡亂)까지 겪는 어려운 여건과 환경에도 불구하고 학업에 정진하여 1669년(현종 10)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가 되었다. 때마침 公의 명경(明經)과 효행을 높이 산 관찰사(觀察使) 이태연(李泰淵)이 관직(官職)을 별천(別薦)하였으나 공손히 사양하고 파주(坡州)를 떠나 만경(萬頃)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소식이 원근(遠近)에 전해지자 장보(章甫: 儒生)들이 모여들어 성시(成市)를 이루니 公의 학덕(學德)과 충효(忠孝)의 기개(氣槪)와 절의(節義)로 후학(後學) 육성에 정진하였다. 그런 까닭에 公의 집안은 언제나 유생들로 만당(滿堂)을 이루고 집안 가득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1696년(숙종 22) 작고한 뒤 향도(鄕道) 유림들이 천거하므로 조정에서는 조봉대부사헌부지평(朝奉大夫司憲府持平)을 증직하였으며 1812년(순조 12)에는 그의 덕행(德行)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전북 김제(金堤: 萬頃)에 있는 남산서원(南山書院)에 배향(配享)하였다.

고려조와 조선조를 통틀어 보면 문과(文科) 급제자보다는 무과(武科) 급제자가 훨씬 많았다. 그 중에서도 여섯 부자(父子)가 모두 무과에 급제한 특이한 예(例)가 있다. 그 아버지는 남궁일(鎰)로 1838년(헌종 4)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관직을 거쳐 구례현감(求禮縣監)에 이르렀다. 그런데 후에는 아들 5형제가 모두 무과(武科)에 급제함에 따라 가선대 부행동지중추부사겸오위장(嘉善大夫行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에 승자(陞資)되었다. 아들 5형제는 염( ). 전( ). 원(沅). 복( ). 호(浩)이다.

구한말 독립운동가, 교육자, 언론인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남궁억(檍)이 있다. 호는 한서(翰西)요, 아버지는 도사(都事) 영(泳: 헌종 12년 무과급제)이다. 1884년(고종 21)에 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을 수료하고 해관(海關)의 견습생으로 있다가 2년 뒤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었다. 이듬해 전권대신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서기관으로 홍콩까지 갔으나 청나라의 간섭과 방해로 목적지(영국, 러시아, 독일)를 순방치 못하고 2년간 홍콩에 체류하다가 돌아왔다.

1889년 궁내부별군직(宮內部別軍職)을 시작으로 칠곡군수(漆谷郡守)와 내부토목국장(內部土木局長)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 후에 관직을 사임하고 그 해 7월 서재필(徐載弼), 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중앙위원, 서기, 사법위원, 평의원 등에 선출되고 기관지인<대조선독립협회보>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1898년 9월 나수연(羅壽淵), 유근(柳瑾) 등과 함께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하여 국민을 계몽하고 독립협회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다가 일경에 체포 구금되었다. 1903년 감옥에서 나온 뒤<황성신문> 사장을 사임하였는데 1905년 3월 고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나 그 해 11월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하여 사임하고 귀경하였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에 임명되자 동헌(東軒)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여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는데 1907년 일본이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상경하였다. 1907년 11월에는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장지연(張志淵) 등 애국지사들과 함께<대한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어 애국계몽을 위해 기관지<대한협회월보>와<대한민보>를 발행하였으며 1908년에는 강원도에 관동학회(關東學會)를 창립 교육구국운동잡지로 <교육월보>를 발행하였다. 1910년 8월 일본이 우리 나라를 병탄하자 새 세대교육이 필요하다고 느껴 10월 배화학당(培花學堂)의 교사가 되었으며 1912년에는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원장을 겸하면서 독립사상고취, 애국가가사보급, 한글서체창안 및 보급에 힘썼다.

1918년 건강이 악화되어 친지들의 권고에 따라 선조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모곡. 牟谷)에 낙향하였으며 1919년에는 모곡학교를 설립, 무궁화 묘포를 만들어 나라꽃 무궁화 보급운동을 전국에 걸쳐 전개하였다. 또한 애국적 찬송가를 만들어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에 보급하였다. 1933년 11월 기독교계열 독립운동의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간의 옥고를 치루었다.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일본 경찰로부터 받은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1939년 4월 5일 운명하였다(출생은 1863년 12월 27일).

1920년대 우리 나라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이였던 남궁벽(壁: 1894~1921) 또한 함열남궁씨 가문의 빛난 별이다. 그는 1912년 한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오산중학교(五山中學校)교사로 잠시 재직하였다. 그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음악협회 간사로 활동했으며 1920년에 창간된 <폐허. 廢墟>등의 동인으로 활약하였고 변영로(卞榮魯), 오상순(吳相淳), 염상섭(廉想涉) 등과 친교를 맺었다.

작품 활동은<청춘>, <폐허>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자연> <풀> <생명의 신비> <별의아픔> <출생> 등의 작품과 일어 및 영어로 된 시와 수필도 있다. 1970년 1월호 <대한자강회(自强會)월보>에 투고하였던 <애국설>에서는 당시 지도층의 각성과 청소년교육의 중요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27세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작품 수가 극히 제한되어 있으나 얼마 남지않은 유작들은 한국 근대사에서 특이한 세계를 보이고 있다. 그의 문학은 당시 우리 문단에 만연하고 있던 병인적(病因的) 퇴폐성이나 감상에 물들지 않고 그 나름대로 자연의 미실화(美實化)와 생명의 비의(秘義), 대지사상(大地思想)을 추구한 것 등을 특색으로 들 수 있다.

남궁현(炫: 1901~1940)은 1919년 3월 17일 3·1운동 당시 서울의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졸업한 선각자로서 고형진(高衡鎭), 박태련(朴泰鍊) 등과 함께 학생, 시민 등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배포하고 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혀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았으나 굽히지 않고 줄곧 법쟁투쟁을 전개하였다. 1927년 3월에는 조선청년동맹 영광(靈光)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1931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 받았다.

1932년 7월부터 1933년 1월 사이에는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자택에서 정판갑(鄭判甲)과 함께 조기건조업을 하여 그 수입으로 희생된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생계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이로 인하여 1934년 7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같은 해 11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되었다. 그 뒤 1939년 10월에도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또 다시 금고 8월을 언도받았으며, 이듬해(1940년) 3월 19일 옥고 11년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1986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대전국립묘지 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일제말기 도백(道伯)으로 함열 남궁씨의 가문을 지키고 조상님 받들기에 앞장섰던 한 사람으로 남궁영(營)이 있다. 그는 1887년(고종 24)에 태어나(일본) 동경제대(東京帝大) 법문학부를 나와 함평(咸平), 진도(珍島), 사천군수(泗川郡守)를 거쳐 충청북도지사(忠淸北道知事)를 지냈다. 1924년(甲子) 보령의 시조묘(始祖墓)복원 때와 함열의 영모재(永慕齋)건축시(1936년)에는 거금(巨金)을 찬조하고 적극 협력하였다.

1945년 8월 조국광복을 전후한 시기 항일운동과 국민계도에 앞장 섰으며 강원일보(江原日報)를 창립한 남궁태(: 1920~1950)도 함열남궁씨의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그는 춘천 고등보통학교(春川高等普通學校: 춘천고등학교의 전신) 재학 때 이미 항일투쟁과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하는 상록회(常綠會)를 학생 중심으로 조직하여 그 지도자가 되었으며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獄苦)를 치뤘다. 그 후 국내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중국(동북지방)으로 넘어가 상록회를 재건하고 국내조직과 연계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45년 8.15 광복(光復)을 맞이하여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 직후인 1945년 10월 24일 "강원일보" 전신인 팽오통신(彭吳通信)을 8절 양면 등사판으로 발행하였다. 같은 해 11월 27일 제 27호부터 강원일보로 제호를 바꿔 타브로이드 판 5면으로 재출발하였으며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편집국장도 겸임하였다. 편집 방향을 민족정화운동과 향토문화 창달 및 민족독립국가 건설에 역점을 두었으며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하여 반동분자(反動分子)로 몰려 처형되었다.

우리 나라 최초로 신학박사(神學博士) 학위를 받은 남궁혁(爀)은 한국기독교 역사에 큰 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는 1882년 생으로 30세 때인 1911년에 벌써 대한기독교교육협회(大韓基督敎敎育協會)의 초기단계인 "주일학교" 한국인 위원으로 참가하였으며, 1949년부터 설립을 추진한 기독교 선교목적의 기독교방송(基督敎放送) 설립추진위원에 위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설립이 무산되었다가 1954년 12월 종로2가에 있는 "기독교서회" 건물에서 개국했다. 그러나 남궁혁(爀)은 6.25 전쟁 당시 이미 양주삼(梁柱三), 박현명(朴炫明) 등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납북되었기 때문에 기독교방송의 개국은 보지 못했다.

교육자, 언론인, 독립운동가로 이름 높은 남궁억(檍)선생의 외아들 염(炎)은 뉴욕총영사를 역임하였고 손자 진(珍)은 임학박사(林學博士)로 미국 노스캘리포니아대학 교수를 역임한 석학이다. 남궁담(譚)은 1896년(고종 33) 생으로 양주군 노해면(楊州郡蘆海面: 현 도봉구 일원) 면장(面長)을 역임하는 한편 1954년, 서로 화합(和合)하고 후세들에게 가문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 주고자 일가들이 창립한 함열남궁씨종친회 초대회장에 선출되었다. 1957년에는 자금이 없어 정유보(丁酉譜) 발간을 보류하여야 할 처지에 이르게 되자 진(鎭), 윤(潤)씨가 당시 해운공사 사장 련(鍊)씨께 청탁(請託)하여 무이자로 금삼십만원을 차용하여 구족보(舊族譜)를 체계적으로 정비한 정유보를 발간하였다. 그 후 종친회는 종중재산(宗中財産)파악을 비롯한 운용체제를 개선 정비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동안 종친회 역대회장 역임자를 순서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중임(重任)은 적지 않는다.
담(譚), 옥(鈺), 진(鎭), 휘(輝), 일(溢), 윤(潤), 영(泳), 찬(鑽), 협(鋏), 선(善), 규(珪), 산(珊), 균(均), 황(晃), 청완(淸完), 걸(杰)

남궁연(鍊: 조선공사 회장)과 남궁호(浩: 조선공사 사장) 부자와 남궁현(炫: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 작고), 남궁석(晳: 정보통신부 장관. 국회의원 역임), 남궁진(鎭: 국회의원,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문화관광부 장관 역임), 남궁용권(勇權: 관동대 교육대학원장), 남궁성은(成銀: 강남성모병원장), 남궁훈( : 신한금융지주 이사회 의장), 남궁혁(赫: 공군소장), 남궁균(육군소장), 남궁훈(한국게임재단 이사장) 등이 현대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해 온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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